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문단 편집) == [[이성계]]와의 관계 ==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서 이성계의 휘하 여진 26부족들 족장들 중 하나로 이름이 언급되고 병력동원 운운하는 것을 볼 때 [[이지란]]과 마찬가지로 이성계 휘하 여진족 부족장들 중에 하나로 보인다. 먼터무에 대한 기록도 후손인 누르하치가 남긴 기록보다 이쪽의 기록이 더 상세해서 아버지, 아들, 동생 이름도 여기서 나온다. [[이성계]]는 동북면의 [[함경도]] 출신이었지만 그의 영향권은 압록강 인근의 만주와 연해주까지 닿았다고 한다. 북만주에서 지내던 여진 부족장은 이성계와 함께 있던 시절에는 압록강 인근까지 내려왔기 때문에 일단 압록강~두만강 인근 만주와 연해주 일대는 그의 영향권이었다. 기록을 보면 그는 스스로 젊을 때 이성계 어르신을 섬겼다 말했으며 이성계가 고려에서 활동하던 시절 여진 부족들을 동원해 전쟁할 당시 종군하거나 파병했다고 한다. 이성계를 따랐던 이유는 젊은 시절 그와 그의 가족들의 생계가 어려웠을 당시 이성계가 생필품과 거주지를 주면서 살림살이를 도왔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때문에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후 조상의 제사 때문에 동북면에 들르면 찾아와서 만났는데 이건 다른 이성계 휘하의 여진족 추장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먼터무도 한양에 들른 적이 있다. 이성계를 따르던 족장들은 이성계 사후 태종, 세종 대부터 조선과 마찰을 빚었는데 이성계 말년 여진족들이 이성계 어르신 있던 시절에는 좋았다고 한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진족 또한 유목부족으로서 혈통주의가 무척 강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성계가 이들에게 많은 지원을 해 준 '큰 손'이라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성계의 아들인 태종 시절부터 극도로 사이가 험악해졌고 손자인 세종은 [[최윤덕]]을 시켜 먼터무를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했다고 한다. 이성계가 조선 건국 이후 그들을 관리하기는 했고 조선 초기 혼란 때문에 이전처럼 살뜰히 챙겨주기가 어려워져서 이지란을 보내가면서 위로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성계가 [[정종(조선)|이방과]]에게 양위하고 함흥에 있던 시절에는 직접 감독해서 좀 나았던 모양이지만 이성계 사후는 완전히 틀어졌다. 먼터무뿐만 아니라 이성계의 부하였던 여진 추장 아합출의 손자 이만주는 세종 시기~세조 시기까지 조선의 골칫덩어리로 나오는 등 조선 초중기 힘 있던 여진 부족장 중 이성계와 연이 안 닿는 사람이 없었다. [[단종(조선)|단종]] 2년(1454년), [[여진족]][* 실록에는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와 낭발아한(浪孛兒罕)·이귀야(李貴也) 등으로 기록되었다.]들이 토산물을 바치러 왔다가 같이 사냥에 나섰는데 이 광경을 보며 이들은 "우리들은 태상왕(太上王)께서 다시 나오신 줄 알고 내알(來謁)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때가 이성계가 죽은지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시점이었다.[*단종실록 단종 2년 12월 17일 1번째 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